영화 뜯어보기

千と千尋の神隠し,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앨바 2014. 4. 21. 16:47

나의

우울증이 끝나기 무섭게 찾아온 끔찍한 사건 때문에 마음이 폭삭 가라앉아 버린 채,

이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선택한, 치히로를 닮은 carax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나는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치히로가 원래 세계로 되돌아감과 동시에

나에게도 암전과 현실이 덜컥 다가오는데

그 순간이 너무너무 싫더라.

 

(이 아름다운 장면을 바라보는데, 어찌나 서럽던지. 자연은 아름다운 만큼 무서운 존재다.)

 

워낙 유명한 작품인데다,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이다 보니 여러 번 보기도 했고, 그래서인가 꽤 잘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드랬다. 본질적인 의미를 꿰뚫어보지도 못한 채.

나는 늘 그런 식으로 영화를 바라왔던 것 같다, 여지껏.

 

이 작품의 세계관은 내게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듯하다.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고작, 물질만능주의와 돼지로 비견되는 인간. 그런 인간이 망가뜨린 자연. 그리고 모든 죗값을 짊어진 치히로(어린아이). 이름, 자아(自我). 정도.

 

이름을 빼앗기면ㅡ유바바에게 지배당하면ㅡ다시는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설정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이며, 우선, 강력하다.

이름으로 존재가 증명된다는 부분에서 아마 누구나 김춘수의 꽃을 떠올렸을 법 한데, 이 시의 내용이 영화 속 치히로와 하쿠의 관계를 설명하는 듯해서 더욱 흥미롭다.

하쿠는 자신의 이름 대신 치히로의 이름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치히로는 어릴 적 기억을 되감아 하쿠의 이름을 찾아준다.

 

영화를 볼 때마다 하쿠가 강의 신이라는 것 자체를 까먹고 보기 시작하는데,

덕분에 늘 새로운 마음으로 멍청하게 감상할 수 있다.

치히로가 하쿠의 이름을 떠올려 그의 존재를 알아챌 때에도 매번 같이 놀라면서.

 

그치만 이제 리뷰까지 써버렸으니 더이상 잊어버릴 일이 없을 것 같아 조금 섭섭하다.

는 스스로의 과대평가이려나.

 

아무튼,

하야오의 작품은 항상 소녀들의 모험 과정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받은 듯한 상상력을 통해 보여지는 오색찬란한 외부세계의 평온함과 동시에 섬뜩함 또한 담고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토로와 이 영화 속 가오나시 등등이 그 예로 그나마, 형상화할 수 있겠다.

 

도저히 말로 설명하기 힘든 저 존재들과 분위기 때문에 늘 하야오의 작품을 보고 나선

마냥 순수하고 아름다웠다고 얘기하지 못한 채 찝찝함을 남긴다.

 

그래서 토토로 괴담 같은 게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이 영화 역시도 기차역에 머물러 있는 소녀를 둘러싼 소설들이 판을 치고 있다.

진실이야 하야오만 알겠지만, 저 가설들을 싸그리 무시하고 싶진 않다. 순수함을 가장한 잔인함이 인간의 재미난 점이기도 하고.

 

모든 죄를 짊어진 어린 소녀는 어긋난 퍼즐들을 제자리에 맞추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데, 이 자체가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며, 어른들의 잘못을 고칠 열쇠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나는, 무수히 많은 열쇠를 바다에 빠뜨리고 말았지.

악동뮤지션의 노랫말마따나 어른들은, 봄날에 피운 꽃잎을 얼려버릴 정도로 차갑다.

 

다시 만날 수 있겠냐고 묻는 치히로에게 물론, 이라고 대답하고 그녀를 보내주는 하쿠를,

그들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다만 내가 감성적이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그 누구의 손이라도 다시 잡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다시금 그를 꽃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텐데.

 

모두 다, 엉망이 되었다.

 

내 리뷰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