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초입, 서촌 떠돌기
마지막 외근 일정이었다. 마침 금요일인데다 오후 일찍 끝날 예정이었다. 가벼운 마음과 발걸음으로 버스에서 내려 인왕산 언덕길을 올랐다. 미팅이 성공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끝을 내고 서촌이나 헤맬 참이었다.

골목길에 뜬금없이 나무간판이 서있었다. 한옥에다 서재라니. 도무지 지나칠 수 없는 단어의 조합.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골목 안쪽 문을 두들겨 보았으나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차가운 정적만이 있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 저녁을 챙겨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서촌 골목을 돌아다녔다. 통인시장을 옆에 두고 가장 익숙한 길을 올랐다. 올 때마다 낯설어지는 곳. 이번에도 몇몇 가게 빼고는 모두 초면이었다. 구경할 만한 것도 딱히 없어 길을 돌아 내려왔다.
아직 한낮이었는데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 손도, 귀도, 코도 점점 감각이 무뎌져갔다. 점심에 먹은 서브웨이 샌드위치는 열기를 내는 데 온갖 에너지를 다 쓴 듯했다. 따뜻한 국물이 절실했다. 눈은 빠르게 식당 이름과 메뉴를 훑었다. 조금 내킨다 싶으면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아아, 낮술 하고 싶다고.
그러다 대오서점을 마주했다. 함께 있던 동료가 서촌의 랜드마크격인 그곳을 모른다고 하여 괜히 대단한 서울살이 선배마냥 소개를 해주었다. 서울에서인지, 우리나라에서인지 모르겠지만ㅡ이걸 모르면 무슨 소용인데ㅡ가장 오래된 서점이라고.
안온 사이 간판은 더 낡았고, 가게 앞엔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친밀한 척 하는데 더 멀어진 느낌이었다. 동료를 그 앞에 세우고 사진을 찍고 돌아가려던 찰나, 서점 안쪽도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우리는 엽서와 연필 혹은 책갈피로 구성된 기념품을 사고 서점 안쪽 마당을 구경할 수 있었다. 동료가 들뜬 목소리로 사주겠다고 하여 나도 기분좋게 기념품을 건네 받았다. 매번 무언가 얻어 먹는다는 것에 유난히 고마워하던 그녀였다. 작은 보답의 기회를 종종 주어야지, 생각했다.
서점 안쪽도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아예 아이유존과 RM존이라며 사진까지 붙여놓았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자세로 사진을 찍고 놀았다. 문득 이전에 친구와 왔던 기억이 나서 예전사진도 찾아보았다. 벌써 6년 전이었다. 지금은 RM존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지금은 엄마가 된 그녀와 막대사탕을 들고 찍은 사진이었다. 4월의 봄이었다.

6년 전의 나보다 어린 동료와 서점 안쪽을 조금 더 구경했다. 가게 앞과 마찬가지로 잡동사니가 더 늘어난 듯했다. 세월이 쌓이고 물건이 쌓여도, 온갖 셀럽 존이 늘어나도, 오래오래 서촌에 남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다시 길을 나섰다. 옆 골목길로 빠져 나와 먹자골목 쪽으로 향했다. 아 거기라면 뭔가 먹을 만한 곳이 있겠지. 결론만 말하자면 먹자골목으로 향했던 골목길을 도로 돌아와야 했다. 결국 뭔가 특별한 걸 먹어보려던 시도는 접었다.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한 이자카야의 첫 손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대도 않았던 특별한 음식을 먹었다. 차돌박이 탄탄나베. 나는 일본식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나베도 같은 맥락으로다가 별로 취향이 아닌 사람이다. 근데 왜 나베를 시켰냐고 하면 날이 추워 뜨끈한 국물이 절실했으며, 어쨌든 들어오게 된 곳이 이자카야여서 선택권이란 게 다양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 탄탄나베는 예상보다 더, 아니 그냥 그대로 훌륭한 식사이자 안주였다. 기존에 먹어보았던 그 어떤 ‘탄탄’이 붙은 국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무슨 재료가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ㅡ요알못은 그런거 모른다ㅡ콩물 마냥 진하고 구수했다.
취향의 수준을 넘어선 맛이었던건지 동료도 아주 맛있게, 감격스러워하며 국물을 떴다. 우리는ㅡ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ㅡ허버허버,하며 뜨끈한 국물에 적신 고기와 두부를 먹었다. 소주가 달았다.
몸이 녹고 마음이 녹고 조금은 어색했던 분위기도 녹았다. 나와 그녀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자각하진 못했지만 잔소리 아닌 잔소리도 한듯하다. 아, 꼰대...
소주 두 병을 마셨다. 조금 취기가 올라왔다. 아직 8시도 안된 시간이었다. 나는 지난번 갔던 내자동에서 위스키를 한 잔 더 하고 싶었다. 혼자 가고 싶기도 했고, 혼자이기 싫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마음 조금, 부담이 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 조금, 거절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 조금으로 그녀에게 운을 띄웠다. 그녀는 거절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술로 데운 몸으로 당당하게 내자동을 향해 걸었다. 지난번 나를 이곳에 데려와 준 다른 그녀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머쓱했다. 나도 여기 잘 모르는데.
골목을 조금 돌아다녔다.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을 골랐다. 그러고보니 지난 번에도 사람이 많아 결국 지나쳤던 곳 같았다. 자리도 바 가장 안쪽에 두 자리가 남아있었다.

바텐더에게 각자 위스키를 추천 받았다. 나는 우디(woody)한 라인업 중에 골랐고, 그녀는 초심자답게 강렬한 스모크 라인업을 골랐다. (초심자는 두려울 게 없는 법)

결국 나의 한 잔은 오반Oban 14년. 그녀의 한 잔은 라가불린lagavulin 16년이 되었다. 이미 술을 마시고 온 터라 온더락으로 마셨다. 와장창 부어넣어서 나중엔 물반 술반이 되었지만.

곁들여 나온 소고기 타다키와 또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반 술반이 몸에 들어가 마음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또 자제력을 잃고 나를 다 열어보일 뻔했다. 이러니 인간이 싫다는 내 말을 안 믿지, 사람들이.
아홉시 반도 전에 자리를 떴다. 그 어느 때보다 알차고 건전한 금요일 밤이었다. 가는 길 방향까지 같아 그녀와 지하철을 타고 환승을 했다. 안녕. 기분 좋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모처럼 몸도 마음도 가득 들어찬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