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씹어먹기

채식주의자, 짧은 감상평

앨바 2019. 2. 9. 16:23

한 강, 채식주의자

19.01.13~01.29

 

 

'채식주의자'는 사람들이 그녀의 행위를 이해하기 쉬운 속성으로 환원한 호칭에 불과하다. -p.231

팽창의 시대에 축소를 택한 그녀에게 남은 일은 시대착오의 의미 그대로, 살아 있는 화석이 되는 것뿐이다. -p.232

욕망을 감추는 데 들이는 에너지는 욕망의 나신을 드러내는 데 들이는 에너지보다 훨씬 더 막대할 것이다. -p.238

 

- 문학평론가 허윤진이 쓴 해설에서 발췌.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개의 중편소설이 합쳐져 하나의 장편소설을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은

각각 (채식주의자)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한강이 이 작품으로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하여

국내 뉴스 헤드라인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일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그동안 홀로 음침하게 다듬어온 작품의 상상 이미지는

다른 걸 다 떠나서 적어도ㅡ이제는 알게 된ㅡ작품 실체보다는 훨씬 더 친절했다.

 

한 마디로,  

배신 당했다.

 

사실,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만 해도

기분 좋은 배신이었다.

 

아주 기대했던 영화를 실제 극장에서 마주하게 될 때

내 예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짜릿한 성취감을 얻는 것처럼.

 

선홍빛으로 펄떡거리는 그 강렬한 이미지와 이야기를

몹시 평범하고 비겁하고 멋대가리라곤 하나도 없는 그 남편의 시선으로,

메마른 나뭇가지마냥 건조하게 풀어놓은 방식마저도

실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리곤 곧바로

몽고반점으로 뺨을 후드려 맞았지.

 

아, 몽고반점은 그야말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ㅡ이야기 속에서 만들던 것처럼ㅡ비디오 아트 같았다.

 

실제로 나는 종종 전시를 보러 가면서도 비디오 아트는 한 편을 온전히 감상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우선, 작품의 시작과 끝 시간을 맞추지 쉽지 않아서, 그렇고

다소 정적인 회화나 설치미술과 달리 그 자리에 있으면서 거기 있지 않은, 영상은 언제나ㅡ나에겐ㅡ받아들이기 무겁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몽고반점에서처럼 형부의 개인적 욕망ㅡ그토록 바라던 이미지를 현실화시키면서ㅡ으로 인해 발생한 그 비극과 같이

예술보다는 인간 내면을 한꺼풀 벗겨낸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ㅡ심지어 그 내면이 추악함에 더 가까운 것 같아서.

 

라고 써놨지만,

사실 이건 전적으로 독자의ㅡ나의ㅡ문제이다.

 

위 옮겨놓은 해설 마지막 부분에서처럼,

우리는 성숙한 인간인 척하기 위해 많은 욕망들을 숨겨가며 엄청난 에너지를 쓰고 있는데 반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들 또한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불쾌해하며 욕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심 부러워하기도 한다.

 

몽고반점의 형부처럼.

 

그리고 그 불쾌함을 외면하며 나무 불꽃으로 옮겨가면,

생생한 충격과 서글픈 분노를 지나

 

그냥 그대로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와 같이, 그 숲에 찾아온 겨울 비와 같이,

차가울 정도로 평온해지는 감정을 만나게 된다.

 

 

 

어렵다.

고작 한 번 스르륵 읽고 평하기엔 너무 어려운 책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또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집어들 수도 없는 책.

 

한 몇 년쯤 지나고 다시 읽어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을까.

 

두 번째 한강인데,

어째 첫 번째ㅡ소년이 온다ㅡ보다 더욱 버겁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