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uds of Sils Maria
작년 말 까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을 챙겨보고, 그 꾀죄죄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빛나는 줄리엣 비노쉬에게 걸크러쉬 당해버렸다.
영화가 끝난 뒤 씨네큐브 홀에 걸려 있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의 포스터를 마주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그 짧은 시간 이렇게 훌쩍 늙어버린 중년의 줄리엣 비노쉬를 보고 또 한 번 걸크러쉬, 당한 거다.
그래서였다.
예고편만 봐도 끌리는 영화이긴 했지만, 필히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순전히 줄리엣 비노쉬 때문이었다. 새해부터 시끌벅벅한 멀티플렉스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2015년 첫 영화로 선택.
나는 스위스가 좋았다. 그곳의 파노라마 열차를 타곤 꽤 멀리 떨어진 그날의 여행지까지 가는 동안 눈 앞에 지겨울 정도로 펼쳐지는 절경에 그만, 여행을 떠나오기 전 열 달의 고생을 모두 보상 받았다, 고 단언했다.
그리고 내내 스위스 속에서 펼쳐지는 이 영화의 이야기 역시 스위스라서, 더 마음에 들었다. 일 년 내내 눈이 쌓여있는 알프스 산맥과 온통 초록초록한 풍경들. 어슷해져가는 저녁 때에 창문으로 침범해오는 어둠 같은 것들.
때로는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ㅡ지극히 왕따시킨 채로ㅡ시끄럽게 웃어대는 마리아(줄리엣 비노쉬)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모습은 어떻게든 플롯을 쫓아가려고 애를 쓰는 관객들에겐 다소 버겁고 지루한 장면들이었겠으나, 나는 또 그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좋았다. 마리아와 발렌틴보다는 줄리엣과 크리스틴을 보는 것 같아서.
영화는 20대 초반에 만난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시그리드 역을 맡았던 마리아가 20여년이 지난 현재, 시그리드의 상대역인 헬레나 역을 맡게되며 생기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아직까지 본인이 시그리드라고 굳게 믿고 있는 마리아는 리딩 연습 중간중간 격한 감정의 동요를 보여주는데, 이는 이미 본인은 어느 순간부터 헬레나가 되어 있었음을 깨닫고 행하는 부정의 몸짓이었단 생각이다.
어린아이 같이 칭얼대는 그녀를 달래는 것은 아마 시그리드의 이미지에 가장 적합하여 캐스팅했다고 생각되는 발렌틴, 즉 크리스틴 스튜어트인데, 재밌게도 그녀는 헬레나가 훨씬 더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라고 열렬히 주장한다. 결국 이 싸움 때문에 둘은 갈라서게 되고.
연극 속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상황이 그대로 영화 속 마리아와 발렌틴의 그것으로 반복된다. 동성애.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갈등과 이별.
그리고 여기에 마리아를 시그리드에서 헬레나로 성장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 조앤(클로이 모레츠)이 끼얹어진다. 20년의 세월을 이끌고와 다시 펼쳐지는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마리아가 한 때, 그리고 평생 자신이라고 여겼던 시그리드의 새로운 얼굴. 잘 나가는 할리우드 스타이자 독보적 악동. 스캔들 메이커. 등등.
조앤을 구글링하는 순간, 마리아는 깨달았을지 모른다. 자신은 더이상 시그리드가 아니라는 것. 조앤의 발칙한 행동이 담긴 영상들을 찾아보며 마리아는 말 그대로 빵 터진다. 나는 그 장면이 그녀가 한 평생을 억지로 품고 왔던 시그리드를 놓아준 때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정면으로 헬레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점.
물론 그 이후에도 리딩 연습 중간중간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나, 뭐 어디서나 성장 영화에는 아픔이 존재하기 나름이니까.
핵심은 그 '곳'에 있다. 실스 마리아. 그리고 그곳의 구름에.
<말로야 스네이크>가 쓰여진 곳. 20년 전 마리아가 시그리드를 만난 곳. 20년 후 마리아가 시그리드와 헬레나를 만난 곳. 마리아가 헬레나가 되는 곳.
쉽사리 볼 수 없는 말로야 스네이크의 모습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르던 마리아와 발렌틴은 마리아의 일방적인 투정ㅡ이라 부르고 말다툼이라고 읽는, 갈등의 축포를 터뜨리고, 기어코 그 뱀이 협곡으로 들어선 순간 발렌틴, 즉 마리아의 시그리드는 떠나간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온전히, 순순히 본인이 헬레나임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최종 리허설을 하며, 조앤에게 헬레나를 떠나는 순간 잠시 멈춘 뒤 다시 걸어나가 달라는 부탁이 철저히 무시당했을 때에도, 그녀는 고고히 헬레나를 지키고 있는다.
보이후드가 평론가 이동진님의 말처럼 그 소년이 어떻게 내가 됐는가, 를 그린다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우리가 어떻게 시그리드를 떨쳐내고 헬레나가 되는지, 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헬레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