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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뜯어보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감독느님)를 처음 접한 게 2010년.

사귄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남자와 <옥희의 영화를> 함께 보았드랬다.

 

 

그리고 볕 좋은 가을날 기분좋은 산책을 마치고 난, 다소 들뜬 마음으로 티켓을 산 그 순간이 내 인생을 통틀어서도 꽤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될 거다. <살인의 추억>을 아무 정보없이, 그저 제목에 끌려서 스크린에 마주하게 된 그 순간만큼이나.

그 이후로 지금까지, 4년 동안 나오는 그의 영화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차곡차곡 내 안에 쌓고 있다. 홍상수라는 서랍 안에.

 

 

그러다 보니, 정작 그 전에 만든, 그러니까 옥희가 나오기 전에 그가 만든 무수히 많은 생생한 캐릭터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강원도의 힘>과 <생활의 발견>을 빼고는.

 

 

영화는 구경남이 심사 일 때문에 제천에 내려갔다가 오해를 받아 쫓겨나고, 다시 제주도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사랑 때문에 쫓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찌나 처절하고 찌질한지ㅡ물론 그게 홍상수 영화 주인공들의 전유물이긴 하지만, 너무 싫으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뭉글뭉글 차오른다.

 

그리고 2010년을 기점으로 순방향으로 쭈욱, 역방향으로 뜨문뜨문 영화를 챙겨본 내가 느낀, 특히 이번에 이 영화를 보면서 깨달은 가장 큰 부분은 얼핏보면 다 비슷비슷해보이는 그의 영화가 굉장히 많이 변해왔다는 것.

+) 홍상수 작품은 두 번 볼 때 더 재밌다는 것.

 

나는 그의 영화들을 보며 흔히들 말하는 힐링을 받지만ㅡ그리고 어느샌가 내게 홍상수주기가 생긴 마냥, 1년에 한 번씩 홍상수 영화를 보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져온다ㅡ그게 왜, 무엇 때문인지는 여전히 모르고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영화를 고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팬이라고 자청하고 있다. 아마 상수아저씨도 이런 내가 싫을거야.

 

그래서 이번 리뷰는 내가 왜 홍상수 영화를 보며 위안을 받는지를 나름대로 추측해보는 글이 될 게다.

아, 벌써부터 졸음이 몰려온다.

 

'홍상수 영화'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다. 남자, 여자, 여행, 술, 섹스. 영화는 대체로 지인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 (죽도록 찌질한) 남자가 여행지에서 한 여자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다 섹스를 하는 식으로 진행이 되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일단 죄다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이 무진장 추레한 옷을 입은 채 화장기 없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부터가 아주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온갖 낯부끄러운 말을 내뱉곤 하는데, 나는 이게 현실과 너무 밀접해서 좋았던 것 같다.

어쩌면 상수아저씨는 일반적 영화에서 잔뜩 치장된 일상의 껍데기를 쓴 판타지를 혐오하는 듯도 하다. 평론가 이동진은 그를 통념과 싸우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자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끄럼도 없는 캐릭터들에게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설사 남들이 파헤쳐볼까봐 꼭꼭 감추고 있는 욕망과 진심. 그리고 거짓말들.

 

사실 <하하하>를 볼 때만 해도, 나는 그냥 너무 유쾌하기만 했다. 너무 웃겨. 그 뿐.

왜 이 영화를 만들어서, 둘의 여행기를 중첩시켜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걸까, 고민해본 적이 없다.

그게 아마 나 스스로의 한계였던 듯싶다. 아니 한계다, 지금도.

 

근데 그래도 나는 옥희가 좋다. 선희도 좋고, 그보다 어두웠던 해원도 좋다.

그의 영화는 알 거 같다가도 모르겠는 알쏭달쏭한 상태로 달려가다 마냥 낙서같기만 했던 선들이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 되서 끝이 되곤 하는데, 그래서 위에 말했듯 두 번째 볼 때가 더 재미있다.

 

궁금한 점은 과연 배우들은 그 그림을 알까, 라는 쓰잘데기 없는 의문.

이미 상수아저씨 머리에는 다 있지만, 정작 당일날 대본을 받고 우스꽝스러운 대사를 진지한 얼굴로 내뱉어야 하는 그 배우들에게 그 그림이 있을까, 하는 것.

정유미의 인터뷰를 보니, 시사회가 끝나고 나서 이선균과 서로 우리가 영화 안에 있어, 라고 얘기했다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반면에, 상수아저씨가 배우를 고르는 기준도 궁금하다.

문소리 인터뷰에선 <다른 나라에서>를 찍을 때 홍상수 감독님에게 권해효를 추천하며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아마 그의 영화 중에서 제목이 실제 대사로 등장한 유일한 영화가 바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 것 같은데, 어쩌면 그래서 영화 가장 마지막 쯤에 등장하는 고현정의 그 대사가 참 가슴 깊숙이 박히는 듯하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가 된 듯한 느낌도 들고.

문장 자체가 주는 느낌도 좋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야말로 돌직구.

그리고 과거에 만난, 잔뜩 허세에 찬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런저런 판단을 내릴 때 버리듯 내뱉었어야 했던 말.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

 

그리고 최근작들만 보아왔던 내가 문득 느꼈던 것 한 가지.

그의 표현이 다소 부드러워졌다는 것.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캐릭터들은 확실히 근래 작품들에 비해 날이 서있는 느낌이다.

사건이나 꿈의 내용 같은 것도 다소 무시무시하고.

 

그러고 보면 상수아저씨는

화자를 남자로 하느냐, 여자로 하느냐에 따라 표현방식이 또 180도 바뀌는 것 같다.

 

도대체 왜 보지도 않은 것들이 홍상수 영화는 다 똑같지 않냐고 지껄이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튼 그냥 천재 같다, 이 아저씨는.

봉준호 감독과 함께 내가 영영 좋아하게 될 영화 감독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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