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여섯시, 거센 기침과 함께 잠에서 깼다. 달은 이불 위로 내 몸을 자근자근 밟고 다니며 일어나라고 보챘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가 다시 몸을 뉘였다. 그러고도 몇 시간을 지치지 않고 꺙꺙대는 달을 무시하고 나도 지치지 않고 잠을 잤다. 문자 알림음이 두 번 울리기에 핸드폰을 집어 봤더니 이미 열시가 넘어 있었다. 부랴부랴 일어나 시리얼을 먹고 씻었다. 머리 자르러 가야지.
부스스 했던 펌을 풀고 애매한 단발이 된지ㅡ나는 이 헤어스타일의 안톤 쉬거라는 이름도 붙였다ㅡ두 달이 되었다. 층을 싹 없애 버리겠다며 두 달 후에 오라는 헤어 디자이너의 말을 착실히 따라 미용실엘 갔다. 그녀는 후련해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아쉬워했다. 빨리 이 층을 없애고 에스컬이든 뭐든 말아주고 싶다고. 정작 머리의 주인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집에서 나오는 길에서부터 무수한 낙엽을 헤치고 걸어 나왔다. 공트럴파크, 공리단길로도 불리우는 공릉동 기찻길도 노랗고 빨갛게 물들었다. 간만에 따뜻해진 날씨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20분만에 가벼워진 머리와 마음으로 미용실을 나와 길을 걸었다. 햇살에 눈이 다 부셨다. 미리 찾아보고 온 편집샵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골목탐험을 했다. 여기저기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을 돌아보았다.
실컷 둘러본 뒤 공릉에 유일한 책방, 책인감에 왔다. 매번 지나쳐만 가다 지난번 친구와 첫 방문을 했던 곳이다. 그땐 맥주에 책을 조금 곁들이며 짧은 시간머물렀었다. 한 시가 채되지 않은 시간에 도착했더니 주인 아저씨가 황급히 마스크를 쓰며 맞아주었다. 지난번 탐냈던 자리에 짐부터 내려놓고 아무도 없는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고 싶었던 책도 몇 권 보였다. 판매하는 책들을 함부러 자리로 가져갈 수 없었다. 사장님 개인 소장용 책을 뒤적인다.

연희동 책바에서 낸 <우리가 술을 마시며 쓴 글 2017>과 그림책 한 권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름은 꽤 많이 들었는데. 언젠가 한 번 정도는 가봐야지, 했을텐데 결국 아직까지도 가지 못한 책바에서 손님들이 남긴 글을 가지고 책을 내었다. 이거 인세는 누구한테 돌아가는거야. 다 같이 나눠가져야 하는거 아니야. 괜히 심술 궂은 생각이 들었다.
주인장이 내주는 주제를 가지고 손님들은 포스트잇 한 장에 짧은 글을 담았다. 아마 비장하게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다음에 써내려갔겠지. 누군가는 쉽게 술술, 누군가는 고민만 하다 한 자도 쓰지 못했을거다. 몇몇 글은 정말 좋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하고 담백한 글들도 마음에 들었다. 읽고 나니 웃겼다. 왜 우리는 남의 사사로운 얘기 읽는 게 재밌을까. 왜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감정이입하는 걸까.
우리 사는 모양새가 그렇게나 다 비슷한가.
마지막 에세이도 좋았다. 공감각, 누군가는 프루스트적 감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후각과 청각, 시각과 미각이 불러오는 과거로의 여행을 경험한 이야기들. 자신에겐 없을 거라 생각했던 타임머신을 발견한, 그리고 그걸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의 이야기. 내가 무심코 지나쳐온 공감각들이 떠올랐다. 향수 냄새로 기억하는 여행지의 공기들. 에쿠니 가오리와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 속에 숨겨놓은 학창시절. 에픽하이와 장범준이 불러오는ㅡ이건 온국민이 그렇겠지만, 아니 사실은 내겐ㅡ가장 우울했던 시절의 나를 살게 해준 산책길의 기억.
에세이의 저자는 책바에서 미각에도 눈을 떴다고 한다. 미각이라,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리라. 내 미각의 타임머신. 그래, 한 번 기다려볼게. 기대해볼게.
이 글은 나의 블로그 재건을 위한 첫 글이 될 거다.
‘어쨌든’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계속 쓸 거다. 어떤 글이든, 쓸 거야.
서툴고 엉망진창이고 거지 같아도 쓰고 또 쓸 거다.
나는 꾸준함의 힘을 몸소 깨달은 사람이니까. 이 이야기 역시 언젠가 블로그에서 풀어볼거다.
오늘은 와인에 재밌는 드라마나 보고 쉬어야지.
날 좋은 토요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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